책 100권 버킷리스트

멀리서 반짝이는 동안에 / 안시내

떠돌이별 2023. 5. 13. 22:03

여행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순간들을 선물해 주는 것

 

*여행의 동반자

​ - 싱가포르

혼자임에,혼자 떠남에 익숙한 내가 홀로 떠나길 결심한 세 시간만에 너를 그린다

멀리서 반짝이는 동안에, 83쪽

 

여행에 관해서는 항상 혼자였다. 

가끔 동행이 생기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나는 혼자였다.

내 여행 스타일에 통일성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그게 편했다. 

어딘가 방송에서 빠니보틀님이 말하기를, 이제 혼자 가는 여행이 지쳐서 혼자는 별로 안가고 싶다고 하더라.

나도 이제 함께하는 여행에 익숙해져 볼까 한다.

아직 안갔지만 가을의 싱가포르가 더 기대되는 이유.

 

*영원한 나의 부다페스트.

​ - 헝가리, 부다페스트

여행을 와서 행복했던 일들을 이것저것 내뱉어보았다. 말로 내뱉으면 머릿속을 떠도는 추상적이고 몽롱한 생각들이 조금은 정리될 것 같아서.

(중략)

너무나도 사소하고, 너무나도 단출했다.

"근데 그러면 이 여행이 아니라 인생 자체가 매일 행복해야 하는 거 아냐? 그건 아니잖아."

"있잖아. 나는 한국에서는 그런 행복한 일이 있더라도. 다른 것들 말이야. 예를 들면 하지 못한 과제라든가. 취업이라든가 학점... 어쩐지 불안하고 초조해서 그 행복을 이런 생각들로 결국 뒤덮어버렸어. 내 현실은 이런데 이런 거에 행복해도 되나 싶어서.

그래. 나 역시 똑같다.

근데 참 신기한 게 모든 걸 놓고 떠나면, 오직 나만이 존재한다. 나를 괴롭히는 것들 말고, 그날의 기분은 오로지 본능적인 나에 맞춰진다. 어떤 좋은 냄새를 맡았는지, 내 혀가 어떤 맛들로 자극되는지, 내 귀에 감미로운 것들이 들리는지, 내 배가 부른지, 떠나기 전에는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이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버린다.

멀리서 반짝이는 동안에, 83쪽

 

자타공인 부다페스트 중독자. 내 인생의 도피처. 

목적지가 없어 하염없이 걸어다니던 골목들, 길을 잃은 덕분에 발견한 보세 옷가게, 거기서 5천원 주고 샀던 후드티를 한학기 내내 입고 다닌 기억, 아직도 기억나는 길의 이름들, 부다페스트만 가면 먹었던 KFC.

몇년만에 다시 간 한인민박에 아직도 남아있던 내가 썼던 방명록, 분수에 발 담그겠다고 챙겨나간 수건, 세일 기간에 5유로 주고 구매한 은색 운동화, 그리고 매일 밤 바라본 야경. 

부다페스트는 나에게 무얼 하더라도 용서가 된다. 같은 일이 오스트리아에서, 혹은 한국에서 일어났더라면 상처받았을 일도 부다페스트라면 괜찮다. 그 곳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혹은 무엇을 해도 여유로우면서 할 일이 있다.

나에게는 부다페스트 자체라서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급 뜬금. 부다페스트 가고 싶다. 그래도 절실하지 않은 거 보면 현실이 나쁘지 않은거 같기도.

*후회

​ - 오스트리아, 그라츠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내 수많은 순간들을 후회했다.

천 원 때문에 경찰서에 간 것,

땀을 잔뜩 흘리는 사이클 릭샤왈라에게

바득바득 현지인 가격을 준 것도.

매일매일 전투적으로 여행을 했던 것도,

무언가에 항상 화가 나 있던 것도,

배를 곯으며 다녓던 것도,

고작 천 원을 아끼려고 값진 인연들을 두고 숙소를 옮긴 것도,

베풀지 못했던 수많은 상황들도.

못난이 여행자였던 그 시절 내 모습이 미워졌다가 다시 그리워진다.

멀리서 반짝이는 동안에, 125쪽

 

오스트리아는 여행이 아니라 일상이었다. 그것도 익숙하지 않은 일상. 그 익숙하지 않음을 받아들였어야 하는데 나는 화를 냈고, 강하게 경계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러지 말껄, 그때는 다르게 행동할껄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면 지금도 항상 실수하고, 또 후회하길 반복한다. 여행이라면 하나의 에피소드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 있는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곤 하지. 아?그래서 일상을 여행처럼 인가?

 

*시간과 정신의 방

- 일본, 요나고

오늘의 생각을 내일로 미룰 수 있는

가장 사랑하는 시간 중 하나

멀리서 반짝이는 동안에, 136쪽

 

작가님 정도는 아니겠지만 나도 한때는 긴 여행을, 긴 기차와 긴 비행에 익숙해져 있었다. 다만 더 이상 그럴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19년, 내 일본 여행은 동해에서 배를 타고 16시간. 그 시간동안 인터넷도, 외부와의 연락도 단절된다.

이번에는 로밍을 해서 인터넷을 실컷 하다 와야지 라는 생각을 한 나를, 왜 그렇게 변했냐며 의아해하듯이 여행은 나에게 긴 시간과 정신의 방을 주었다. 나는 오후 4시에 잠을 자고 가만히 누워있다가 또 잠을 자고 새벽2시에는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린다. 본능에 충실해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보낸다.

*2014년의 유럽 그리고 2017년의 유럽

- 오스트리아, 그라츠

- 헝가리, 부다페스트

빛나야만 했어야 할 이십대 초반에는 불행하게만 보였던 나의 배경과 얕은 자존감은 내 삶과 그토록 아름다운 시간들을 갉아먹고 또 갉아먹었다. 머릿속은 온통 세상에 대한 원망과 불만 또, 결국엔 잘 되지 않을 거라는 우울한 확신 속에서 인도는 그 시절의 내게 처음이자 마지막 자유였고 행복이었다.

멀리서 반짝이는 동안에, 186쪽

 

더 넓은 세상과 새로운 경험을 위해 14년, 오스트리아로 떠났다. 좋았던 추억이 물론 많지만 오스트리아를 떠올리면 아팠던 순간들이 먼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했는데 나는 이미 한국에서도 행복과 자유를 느끼고 있었다.

그에 비해 모든 것이 암울하고 스스로를 옭아매던 17년의 나에게는 유럽 여행이 하나의 도피이면서 터닝포인트였다. 새로운 시작을 하기 전에 스스로에게 이제는 그 상황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위안을, 비로소 되새김질 할 수 있는 여유를 준 곳.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쳤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나의 책임을 다 하고 도달한 평온.